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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코로나19 관리병동에서의 생활

  • 2020.07.07
  • 작성자 : 중앙센터
  • 조회수 : 2227
이 글은 대한간호협회에서 지난 4월 23일부터 5월 8일까지 진행한 '코로나19 현장 스토리 공모전'의 수상작으로, 최소한의 윤문·검수를 거쳐 발행합니다. 소중한 경험을 나누어주신 이주리 선생님, 고맙습니다.

 

관리병동의 서막

2월 19일. 4일 동안의 오프를 끝내고 오후 근무를 위해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3월 신규간호사 교육을 위해 4일 내내 교육 지침서와 씨름하다 보니 빨리 출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동을 켜고 근무표를 확인하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친구였다. “큰일 났어, 너희 병동 폐쇄되었대. 출근하지 말라고 전화 안 왔어?”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얼마 전 감염관리 실장님과 한 대화가 생각났다. “코로나 확진자 생기면 우리 호흡기 병동에서 봐야겠죠? 음압병실도 있고 우리가 당연히 간호해야겠네요.” 중국 우한 폐렴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여서 먼 나라 얘기일 거라고 생각하며 쉽게 나누었던 대화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병동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수회 전화를 시도한 결과 병동 후배는 출근하지 말고 기다려야 된다는 얘기만 하였다. 나는 불안해져 전화기만 보고 있었다. 후배 간호사들이 병동에 있는데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2시간이 지난 무렵 간호처에서 연락이 왔다. 출근해서 관리병동을 열어야 한다고 하였다. 가족들에게는 대충 이야기하고 서둘러 출근을 하였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였다. 병동 입구는 폐쇄 문구가 붙어 있고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간호사, 호흡기 내과 교수님 모두 지친 모습으로 있었고 울먹이는 후배 간호사들을 보며 다독이고 위로해 주었다.

 

공포의 방호복

관리병동 구축을 위해 음압기 설치, 투석기 설치, 폐기물 처리 등 격리환자와 의료진을 위한 장비 및 시설물 등이 마련되었다. 병실 내 음압기 소음으로 귀가 종일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소독제의 강한 냄새로 속이 울렁거렸다.

방호복은 땀과의 전쟁이다. 방호복 안에 입은 옷은 땀에 절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기 힘들어 물, 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없었다. N95 마스크로 코가 막히고 입안이 건조해졌다. 마스크 끈이 귀 뒤에 닿아 귀가 아프고 콧잔등이 항상 붉게 헐어 있었다. 장비는 나를 보호해주지만 그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보호 안경 안은 땀과 습기로 가득해 따갑고 눈앞이 흐렸다. 한 의료진은 안과에서 수영을 배우냐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안압이 올라가 있었다. 보호 안경의 압박은 수경의 압력만큼이나 높은 것 같았다.

PAPR(Powered Air Purifying Respirator, 전동식 공기 정화 호흡기. 편집자 주)은 신선한 공기가 주입되어 시원했지만, 허리에 찬 기계의 무게 때문에 허리와 무릎 통증이 지속되었다. 일상의 행복이 너무나 그리운 순간들이 아마도 방호복을 입을 때일 것이다. 한동안 악몽을 꾸었다. 입과 코를 누가 막고 있어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잠을 설치곤 했다. 방호복을 입는 입구에 들어서면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의 일과

환자들과 계속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들었다. 와상 환자들의 삼시 세끼를 떠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머리를 감기는 등 가족이 되어버렸다. 농담으로 후배들에게 ‘정 주면 안 된다. 나중에 마음 아플 수 있으니까 마음 잘 추슬러야 된다’라고 냉정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 가면 생각나고 눈물이 나고 우울감이 지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중3 아들과 농담하며 기분전환을 했다. 개학 연기에 신나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들 녀석을 볼 때마다 건강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잘 견디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위해 늘 고영양식의 밥상을 차려주셨다.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해 각자 방에서 지내고 혼자 식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쉬는 날엔 방에서만 온종일 지냈다. 코로나 관련 뉴스를 보며 확진자가 줄어들기를 바라며….

평소 근무하는 모습의 이주리 간호사

 

그리움

20일째 입원해 있던 50대 환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를 붙들고 싸우고 있다. “아들 당장 입원시켜줘. 안 그러면 신고 할 거야”라고 말하며 보건소, 시청 수시로 전화하며 일과를 보냈다. 경증환자의 경우, 입원시설 부족으로 자가격리 되어 있는 환자들이 많았다. 부모는 자식이 걱정되어 계속 민원을 제기했고 의료진에게 집에 보내달라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수일을 가족도 못 보고 갇혀있다는 것에 환자들은 우울감을 표현했고 심지어 화를 참지 못하고 사소한 일로 다른 환자들과 싸우기 일쑤였다. 심리지원 프로그램으로 안정을 유도했지만, 환자들은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조현병이 있는 긴 생머리 중년 여성이 입원했다. 가족이 없었고 유일하게 오빠가 있었으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닿아 있었고 머리를 감지 못했는지 수세미처럼 엉켜있었다. 머리부터 감기고 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묶어 주었다. 질문에 아무런 반응이 없던 환자는 기분이 좋아졌다고 했다. 다행히 밥도 잘 먹고 호전을 보였다.

87세 허리를 다친 할머니가 입원하였다. 수시로 침상에서 내려오려고 시도하여 간호사들은 계속 라운딩을 하며 집중적으로 관찰하였다. 설사로 기저귀 발진이 심한 상태였다. 기저귀를 벗기고 수시로 씻기고 약을 도포하였더니 금세 좋아졌다. 설사가 멈추니 식사도 잘하고 허리 통증도 좋아져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치매가 있었다. 항상 창밖을 바라보며 "강원도 정선에 가야 한다. 여기서 걸어가면 얼마 안 되는데. 감자도 캐야 하고 바빠"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고향은 늘 바뀌곤 했다. 어느 날은 강원도 정선이었다가 어느 날은 인천, 어느 날은 내 고향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강원도를 계속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강원도가 맞는 것 같았다. 수일 끝에 할머니는 완치되어 강원도로 퇴원했다.

아침부터 머리를 감고 곱게 단장을 한 할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보자기에 짐을 쌌다. 짐 안에는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할머니는 아들 보러 간다며 매일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임종을 맞으며

경증에서 중증 환자까지, 치매, 골절환자, 정실질환 환자 등 여러 질환이 있는 확진자들이 음압 텐트에 실려 입원을 하였다. 경증환자는 다행히 병실에서 휴대폰을 벗 삼아 적응을 하였다. 그러나 경증에서 한순간 중증으로 급격히 악화되는 모습을 보니 의료진 모두 불안감이 심해져 갔다. 모두가 처음으로 치료하는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갑작스러운 상태 악화를 지켜보면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증상에 맞는 치료와 간호를 위해 매진하고 또 매진하였다.

노인의 기저질환과 급격한 상태 악화로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 거부. 편집자 주)을 원하는 경우 편안한 임종을 위한 임종실이 마련되었다. 95세 여자 환자가 처음으로 임종실로 옮겨졌다. 부르면 겨우 눈을 뜨는 정도였고 악화 전 간단한 대화는 되었지만 난청으로 긴 대화는 어려웠다. 5남매를 둔 환자에게 매일 딸, 손자, 손녀가 편지를 보내왔다. 난청이 있었지만 큰 소리로 얘기하면 들을 수 있다는 자녀들의 요청에 우리는 편지를 읽어주었다. 큰 소리로 읽어야 하는데 목이 메 읽기가 힘들었다. ‘엄마 고마워, 사랑해. 편안하게 치료 잘 받고 퇴원하면 온천도 가고 꽃도 보러 가자’, ‘할머니 보고 싶어요. 꼭 만나요’. 가족들의 그리움이 가득한 편지를 읽다 보니 우리들의 얼굴은 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음 날 보호자의 임종 전 면회를 하기로 했다. 50대 후반의 딸이 면회를 왔다. 주의사항을 알린 후 방호복을 같이 입고 임종실로 들어갔다. 90대의 노모를 대면한 딸은 대성통곡하며 ‘엄마’를 외쳤다. 보호자를 진정시키고 가족들이 전하고 싶은 얘기를 해드리도록 했다. 환자는 눈을 겨우 떴지만,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딸은 엄마에게 "우리 형제들 잘 키워줘서 고마워. 엄마 고생했어" 하며 눈물을 흘렸다. 호흡기 병동에 있는 환자들은 만성질환자로 예견된 상태에서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감염병으로 마음의 준비도 없이 부모를 만날 수도 없고 전화로 사망 소식을 들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딸은 엄마의 편안한 모습에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의료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딸을 만난 다음 날 환자는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환자와 정이 들어 있던 간호사들은 눈물을 훔쳤고 슬픔에 잠겨 우울해했다. 20년 차가 된 내가 이렇게 슬프고 가슴 아픈데, 20대인 젊은 간호사들이 감당하기에는 참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라는 이유로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다.

또 한 명의 환자가 임종실로 옮겨졌다. 남편과 함께 입원하였고 남편은 완치되어 퇴원했지만, 본인은 상태 악화로 가족들에게 DNR 동의를 받은 후 임종 전 면회를 기다렸다. 의식 저하로 대화가 어려워졌다. 아들이 임종 전 면회를 하기로 했다. 방호복을 입은 아들은 엄마를 보자마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갔다. 아들이 떠나고 잠깐 의식이 돌아왔고 아들이 왔다 갔는데 기억나는지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는 남편이 잘 있는지 물었다. 남편 걱정으로 의식이 깰 때마다 남편 이름을 불렀다.

 

내 생에 첫 방송

뉴스에서 촬영을 하러 왔다. 방호복 착탈의 모습, 관리병동 내 모습 등 의료진들의 모습을 찍었다. 방송국에서 리얼다큐를 찍는다고 연락이 왔다. 아침 일찍부터 카메라가 관리 병동을 밀착 취재하였다. 담당 PD는 땀을 흘리며 의료진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 잠시 입고 있는 것도 너무 힘들다며 고통을 토로하였다. 간호하는 우리 모습, 방호복을 벗은 얼굴이 짓눌린 모습 등 리얼한 모습을 촬영하고 인터뷰를 했다. 투석 전담 간호사는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집에 있어 아이들이 보고 싶다는 얘기, 숙소에 지내고 있어 집밥이 먹고 싶다는 얘기 등등 현장의 소리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다행히 촬영이 무사히 끝나고 방송되었다. TV로 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자랑스럽고 대단한 영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부 행렬

울산에 거주하는 여학생이 선물을 보내왔다. TV에서 방호복으로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고 손수 헤어밴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스포츠 의류 브랜드에서는 땀 흡수에 좋은 의류도 기부하였다. 음료, 간식 등 기부행렬이 이어졌다. 여러 기업에서 홍삼, 비타민 등 건강보조식품으로 의료진들의 체력 보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병원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인력, 물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힘든 시기에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마치며

5월이 다가온다. 이제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완치되어 퇴원하는 환자도 많고 지역 내 확진자도 줄고 있다. 겨울 코트를 입고 관리병동으로 출근했는데, 이제는 반소매를 입는 계절로 바뀌었다. 벚꽃 구경을 하던 우리 병동 11층에서 어느덧 벚꽃은 지고 아카시아꽃이 보인다. 아직도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등 생활지침은 그대로지만 곧 코로나 확진자는 없어지고 예전의 호흡기 병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는 방호복 없이 핑크색 근무복을 입고 환자들도 가족과 함께 외롭지 않게 지낼 것이다. 코로나19 관리 병동에서 근무한 경험은 힘든 일이 닥쳐도 그때를 생각하며 버틸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언젠가 감염병 유행이 또다시 올지도 모른다. 그 유행에 우리는 또 환자들을 지켜내고 하나가 되어 이겨낼 것이다.